본문 바로가기
Sports

90년대 후반 K리그의 흥행을 이끈 3인방

by Jin1140 2022. 10. 29.
반응형

사진출처: 서울신문

모든 나라들이 그러하듯 국가대표팀의 성적을 내는데 가장 뿌리가 되는 것은 자국 프로리그와 유소년 시스템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대한민국 프로축구 최상위 리그인 K리그는 사실 흥행 면에서는 굉장히 저조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TV나 스마트폰 등으로 유럽의 화려한 축구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이다 보니 K리그는  국민들에게도 외면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까운 일본 J리그의 경우 최근 몇 년 간 많은 투자를 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선수들도 영입하며 흥행을 이끌고 있는데요, 저는 꼭 이름 값있는 스타 선수들 영입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많은 시도와 정책을 통해 K리그가 흥행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K리그의 봄이나 다름없었던, 최고의 흥행이었던 90년대 후반의 K리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데요. 그 당시 K리그의 흥행을 이끈 일등 공신은 바로 축구계의 꽃미남으로 불리던 안정환, 이동국 그리고 뛰어난 재능으로 맹활약을 펼쳤던 고종수 선수의 존재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당시 세 명의 선수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선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출처: 조선일보

 

1. 왼발 스페셜리스트, 뛰어난 재능과 아쉬웠던 멘탈의 고종수

첫 번째 선수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재능 중 한명이었던 고종수 선수입니다.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하던 고종수 선수는 당시 정확하고 강력한 왼발 킥 능력으로 소속팀 수원 삼성을 상승세를 이끌던 선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대표팀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던 선수였는데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꿀리지 않는 기술과 실력을 갖췄던 선수였습니다. 한 가지, 멘탈적인 부분이 아쉬웠던 선수였는데 만약 멘탈적인 부분도 좋은 선수였다면 박지성 선수보다 한 세대 앞서 나온 슈퍼스타가 될 가능성이 충분한 선수였습니다. 멘탈 부분이 약하다 보니 자기 관리에도 소홀했던 편이라 잦은 부상도 고종수의 전성기를 빠르게 추락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시절 대표팀의 실질적인 에이스 역할을 했던 선수는 고종수 선수였고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고종수에게 한국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브라질 선수처럼 플레이하는 선수라는 평가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았습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초창기, 히딩크 감독은 고종수의 재능에 대해 높게 평가하였고 고종수를 대한민국 대표팀의 에이스로서 팀을 꾸려가려 하였으나 부족한 체력이 결국 발목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전방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그 시점부터 고종수의 실력은 추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의 최전성기 시절이던 1996~2002년까지 고종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에이스로서 통산 141경기 42골 44도움이라는 뛰어난 공격포인트를 양산했고 그 이후 부상으로 하락세를 겪으며 일찌감치 전성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K리그 팬들은 고종수의 정확하고 강력한 왼발 킥과 뛰어난 기술로 경기를 보는 재미를 크게 느끼며 엄청난 흥행을 끌어냈습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재능에 비해 좋지 못한 멘탈로 인해 악마의 재능이라고 불리던 선수들이 많았었는데 한국에는 고종수 선수가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진출처: 서울경제

2. 다사다난했지만 뛰어난 자기관리로 롱런에 성공한 라이언킹 이동국

두 번째 선수는 라이언킹 이동국 선수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여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동국 선수는 앞서 소개해드린 고종수 선수와는 달리 40이 넘는 나이까지 활약하며 롱런했던 선수였습니다. 포지션은 최전방 스트라이커였으며 1998년에 데뷔하여 황선홍 선수의 뒤를 잇는 대형 스트라이커로서 기대를 모았으며 이러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할 만한 재능과 뛰어난 외모를 바탕으로 여성 팬들을 구름 떼처럼 몰고 다녔던 선수였습니다. 1998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그해 여름 바로 프랑스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며 월드컵 무대도 경험하였습니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매 시즌 두 자릿수 가까운 득점을 올려주었고 그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 이적하였으나 특별한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귀국하여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부진을 겪다 보니 결국 자기 무대로 만들 수 있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동국 선수는 2002년 월드컵 엔트리 실패가 약이 되었는지 그 이후 K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쳤고 K리그 최고의 공격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전성기를 구사하고 있던 이동국 선수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붙박이 최전방 스트라이커로서 이름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월드컵을 1개월가량 남겨둔 시점에 리그에서 경기 도중 십자인대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며 또다시 월드컵 무대에 서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부상을 회복한 이동국 선수는 K리그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미들즈브러로 이적을 하게 되었으나 유럽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결국 1년 만에 다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K리그로 돌아온 이동국은 전 소속팀이었던 포항이 아닌 성남FC로 이적하였는데 팬들의 기대와 달리 전술적인 지시에 대한 불만과 기존의 공격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결국 부진한 성적 끝에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추락하고 있던 이동국 선수에게 손을 내민 건 자신의 첫 커리어를 시작한 포항 스틸러스가 아닌 전혀 연관성이 없던 전북 현대모터스였습니다. 전북 현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잡은 이동국과 전북 현대는 K리그 최강의 팀으로 날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인연이 없던 월드컵 무대도 드디어 밟게 되었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여 주전 공격수는 아니었지만 16강 진출에 공헌하였고 이동국은 마치 오래 숙성된 와인같이 계속하여 좋은 활약을 하며 그동안 인연이 없던 득점왕 타이틀, 도움왕 타이틀도 따내며 전북 현대모터스의 레전드로 등극하였습니다. 중동 아시아 쪽 클럽에서 거액의 제안을 하며 이동국을 유혹하였으나 이동국은 자신의 가장 힘든 시기에 손을 내밀어준 전북 현대와 최강희 감독을 위해 팀에 잔류하며 2020년 선수 은퇴 시 까지 전북 현대에서 무려 11년의 세월을 보내며 많은 트로피와 영광을 함께 하였습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3. 연예인의 버금가는 꽃미남,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 안정환

세 번째 선수는 테리우스 안정환 선수입니다. 사실 이 포스팅을 하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안정환 선수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축구 역대 선수 중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한명이 바로 안정환 선수였습니다. 안정환 선수는 부산 대우 로얄즈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하여 유럽 선수들에 비견될 화려한 기술과 당시 인기를 끌던 남자 연예인들도 울릴 만한 꽃미남 외모를 가진 선수였습니다. 워낙 뛰어난 외모를 보유하고 있다 보니 당연히 엄청난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실력 또한 워낙 대단한 선수였기 때문에 비단 여성 팬들만 경기장에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시아 출신의 선수라고 보기에 놀라운 유연하고 섬세하고 화려한 볼 터치와 턴 기술, 그리고 뛰어난 연계 플레이와 패싱 등 안정환 선수는 한국이 낳은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1998년 데뷔하여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 2년간 활약하며 팀을 정상에 올려놓은 뒤 이탈리아 세리에 A 소속 페루자로 임대 이적하였고 이탈리아 무대에서도 안정환의 기술은 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던 세리에A였지만 안정환의 실력은 그곳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세리에A 최강 클럽 중 하나였던 유벤투스와의 경기가 가장 압권이었는데 유벤투스 소속의 수비수였던 릴리앙 튀랑 선수는 '분명 델 피에로는 우리 팀에 있는데, 델 피에로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라는 말을 남긴 거로 유명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언론이나 전문가들, 그리고 유럽의 축구 인사들은 안정환에 실력에 극찬을 보인 사례가 매우 많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안정환 선수가 한국인이 아닌 유럽 출신 선수였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되었을 거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만큼 뛰어났던 안정환 선수는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연장 후반 극적인 헤딩 결승 골을 뽑아내며 이탈리아를 탈락시키게 되었는데 이 골로 인해 이탈리아는 안정환에게 분노했고 특히 소속팀 구단주는 안정환 선수를 대놓고 배은망덕하다는 식으로 비난하며 어처구니없는 언행을 펼쳤습니다. 그렇게 말했던 구단주는 파산해서 지금은 구속 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역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타의로 이탈리아를 떠나야 할 상황이 되어버린 안정환 선수는 잉글랜드 블랙번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영입을 추진하였으나 안정환 선수의 복잡한 계약 상황으로 인해 계약에 실패하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에이전트를 맡았던 사람은 안정환에게 위약금을 물게 만들며 안정환 선수의 커리어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빚더미에 안게 하여 유럽이 아닌 일본으로 이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안정환 선수는 일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빚을 청산해나갔고 사기꾼이나 다름없던 그 에이전트와 계약을 마무리하고 다시 유럽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최전성기 시점에 다시 아시아로 돌아온 안정환은 예전만큼 유럽 무대에서 인기 있는 선수는 아니었고 결국 프랑스 리그앙에 약체팀이었던 FC 메스 그리고 다시 독일의 뒤스부르크로 이적하여 활약했으나 여전히 뛰어난 기술을 선보였으나 예전 같은 모습은 아니었고 결국 다시 K리그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팀은 친정팀이었던 부산 아이파크가 아닌 수원 삼성으로 돌아왔고 수원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무개념 팬에게 가족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폭발하며 충돌했고 결국 한 시즌 만에 수원을 떠나 친정팀이던 부산으로 이적하였습니다. 부산에서 1년간의 활약 후 중국 무대로 자리를 옮긴 안정환은 다롄 스더에서 3시즌을 활약하며 중국 무대에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였고 단 3시즌을 활약했지만 레전드 대우를 받으며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사기스러운 계약 등이 아니었다면 안정환 선수는 더 높은 곳에서 더욱더 날아오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데 너무너무 아쉬웠습니다. 현재는 방송에서 예능인 겸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데 최종 안정환 선수의 목표는 유럽에서 지도하는 첫 한국인 감독이 목표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꼭 그 꿈을 이루어 좋은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가길 기원합니다. 

 

 

반응형